저는 성격이 그다지 무난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무난'이라는 말은 '차분함', '온화함', '부드러움', '너그러움' 등등의 뉘앙스를 말합니다. TV에 약간이라도 어이없는 얘기들이 나오면 쉽게 광분하여 와이푸가 저와 같이 뉴스를 안보려고 합니다. 많은 남자분들이 그러하겠지만, 특히 운전석에 앉으면 좀더 격해지죠.
저의 다소(?) 욱하는 기질로 인해, 젊고 철이 없었을 때에는 주위 사람들과 싸움도 많이 했었고, 나이가 들어서도 역시 적을 많이 만들었었습니다. 엔지니어 시절에도 개념없는 고객들과 많이 싸웠고, 개발 프로젝트에서도 고객 혹은 PM(관리자)들과 자주 언성을 높이며 으르렁대곤 했었습니다.
특히 작년 한 해 프로젝트를 하면서 좋지 않은 모습을 자주 보여, 2009년 새해 목표를 "욱하지 말자"로 삼았습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자기 감정을 쉽게 드러내게 되면 득보다 실이 되는 경우가 많더군요.
개발을 그만두고 지금 하고 있는 컨설팅을 하면서 그동안 성질을 많이 죽인 편이었는데, 얼마 전 회사 고참(A씨)과 한바탕 했습니다.
오늘은 그 A씨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A씨는 훌륭한 엔지니어 중 하나였습니다. 엔지니어의 기본 자질 중 하나인 기술에 대한 집착, 좀더 좋은 표현으로 "지적 호기심"이라고 하죠. 모르는 것이 나오면 반드시 직접 찾아보며 테스트해봐야 직성에 풀리는, 하여간 기술에 대한 탐구정신이 대단했었습니다.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바탕으로 일에 대해서도 책임감도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기억력이 좋아서 자질구레 아는 게 굉장히 많았습니다. 취미생활도 다양해서 A씨의 입에서 쉴새 없이 흘러나오는 얘기들을 듣고 있으면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였었죠. 죽이 맞는 누군가와 같이 있으면 저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말할 시간도 없었으니까요.
성격도 무난해서 적이 많은 스타일도 아니었었고, 동료나 후배들이 어려움을 호소하면 직접 나서서 해결해주려고 노력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A씨가 변했습니다.
A씨도 엔지니어를 떠나 프로젝트 인생을 살면서, 나이가 들어 어느덧 프로젝트에서 PL/PM의 위치까지 올라왔고, 큰 문제없이 두어개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던 것 같습니다. (엔지니어 생활을 꽤 오래했었죠) 엔지니어 시절 빼고, 거의 4년 만에 프로젝트에서는 처음으로 다시 만나게 됐습니다.
다시 만난 지 불과 한달 만에, 재회의 기쁨은 사라지고 리더로써의 A씨의 모습에 실망을 하게 됐습니다. 여전히 엔지니어 마인드로 프로젝트를 리딩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무릇 좋은 리더라하면, 프로젝트 전반에 걸쳐 고객과의 좋은 관계를 꾸준하게 유지하며, 팀원들의 업무 진행상황은 모두 머리속에 꿰차고 있어야 하고, 특히 업무 수행에 방해가 되는 어려움들을 끊임없이 파악하고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프로젝트 일정/비용 등의 사업관리는 말할 것도 없고, 주요 아키텍처/제품/프레임웍/기술셋 등의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 충실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놓치기 쉬운 또하나의 중요한 요소, 영업이나 본사의 높으신 분들과의 정치적인 관계도 잘 관리해야 합니다. 리더의 능력을 벗어나는 이슈(주로 비기술적인)는 결국 프로젝트 외부의 자원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이 가장 기본적인 자원관리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비논리적으로 앵알거리는 고객의 입을 막으려 몇날 며칠 고생하는 것보다 법인카드 한방으로 해결하는 게 더 싸게 먹히는 경우가 비일비재 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혼자서 다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저도 그런 많은 기회들을 잡고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어느 것 하나 소홀함 없이 꼼꼼하게 챙겨야 프로젝트가 큰 어려움없이 마무리될 수 있습니다. 리더의 관심과 챙김이 한쪽으로 치우치면 반드시 댓가가 따릅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A씨는 지적 호기심이 워낙 강해서 리더로써 챙겨야 할 여러가지 요소 중 기술적인 부분에만 집중하게 됐습니다. 물론 다른 부분을 아예 등한시 한 것은 아니지만, 평균적인 수준 이하로 관리를 했습니다. (제 기준으로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그 댓가는 혹독해서 프로젝트는 어려움에 빠지게 됐습니다.
프로젝트 오픈 일정은 시나부로 연기되었고, 믿고 있던 팀원들은 지친 몸과 마음을 제대로 추스리지도 못한 채 하나둘 프로젝트를 떠났을 뿐더러, 고객들, 심지어 주위 동료들 조차도 등을 돌려버리는 쓰라린 현실에 직면하게 된 것이죠.
프로젝트가 어려움에 빠진 원인을 전적으로 A씨 탓으로 돌릴 의도는 없습니다. 리더가 균형감있게 여러 프로젝트 요소들을 스스로 챙기지 않으면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됨을 강조하고 싶을 뿐입니다.
저도 A씨와 비슷한 경험을 했었습니다.
당시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여러가지 핑곗거리를 찾았던 것 같아요. 합리화도 그런 합리화가 없을 정도로 정말 부끄러운 기억입니다. 반성당구 치듯 기회가 되면 그때 일을 글로 남겨두고 싶어지는 군요.
저는 그 프로젝트를 끝내자 마자 개발에서 손을 뗐습니다. 당시 PM은 아니었지만, 제가 개발에 집중하면 할 수록 프로젝트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팀원들은 더 힘들어 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개발자들이 더 쉽고 편하게 개발을 할 수 있는 환경과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게 저의 Role"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반백의 머리로 엔지니어의 삶을 사는 몇몇 외국인들을 동경하기도 했지만, 그쪽 동네에서 살 생각이 아니라면 이곳 현실에 맞게 나를 발전(인지 퇴보인지는 모르겠지만)시켜 나가는 게 나와 내 가족을 위한 길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고 이길로 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앞만 보고 달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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